노르망디 상륙 작전 D-DAY 사진 보면서 이해하기 – 19440606

노르망디 상륙 작전 “D-DAY” 관련하여 재미있는 글이 있어 가져와 봤습니다. (출처 : 다음) 하지만 조금 더 흥미를 느끼면서 볼 수 있더록 이미지를 관련성 있는 이미지 또는 영화 이미지를 첨부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D-DAY 사진 보면서 이해하기

노르망디 상륙 작전 D-DAY 사진 보면서 이해하기

“D-Day”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일을 일컫는 고유명사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작전을 시작하는 날”의 의미로 쓰이는 군사 용어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가장 잘 알려진 “작전이 시작하는 날”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개시하던 1944년 6월 6일이 되는 셈입니다.

군사 용어로 D-Day와 H-Hour는 바로 작전이 개시되어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는 日과 時를 의미합니다. 보통 중요한 작전의 개시일과 개시 시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로 붙혀지곤 합니다. 그런 탓에 며칠 몇시라고 얘기할 수 없으니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가령 “H-3″은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더라도 작전 개시 시간에서 3시간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얘기할 때 쓰는 표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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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다른 알파벳을 사용해서 “D-Day”와 같은 표현을 쓰게 된 예도 있는데 즉, 태평양 전선에서 맥아더 장군의 필리핀 수복의 시작이 되는 “레이티 섬 상륙작전” 개시일을 “A-Day”라고 부르는 경우나 1945년 4월 1일에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의 시작일인 “L-Day”는 바로 이런 예가 됩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D”라고 했을까요? 바로 “Day of Days” 즉 Day들 중에서 무척 중요한 “Day”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첫째 날인 “D-Day”에 대한 설명을 차분하게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2차대전 에서 최고로 중요한 날 중에 하나였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차분하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1944년 이태리 전선에서 연합군은 몬테 카시노 전투를 승리하고, 구스타프 라인을 돌파하였을 때 정작 2차대전 최고의 영웅들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과 몽고메리 장군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특히 1943년 연말에 몽고메리는 패튼과 함께 시실리 섬에 상륙한 후에 삽시간에 이태리 본토에 상륙하는데까지 진두 지휘를 하였지만 슬그머니 알렉산더 장군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아이젠하워와 함께 프랑스 서부 해안에 상륙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의 입안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

노르망디 dday 16
노르망디 해변 지도

연합군은 “오버로드(Overlord : 대군주) 작전”이라 불리는 북부 유럽 침공 계획을 준비하면서 그 개시 단계인 노르망디 해안 상륙 작전을 넵튠(Neptune : 로마 신화에 바다의 신)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계획의 골격은 영국군의 프레데릭 모건 장군이 이끄는 기획팀에서 세웠습니다. 육해공군을 긴밀히 연결한 영화 제목 그대로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습니다. 그 개시일인 D-Day는 1944년 6월 6일이었고 노르망디 상륙 후 완벽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6월 30일을 작전 종료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르망디 dday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노르망디 사령관 좌 : 아이젠하워 , 우 : 몽고메리

잘 알려진대로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아이젠하워 장군이었고, 지상군 사령관은 몽고메리 원수가 맡았습니다.

노르망디 dday 부대

상륙 당시에 독일군의 방어 총 사령관은 게르트 폰 론트슈테트 장군이었고, 대서양 해안 방어를 책임진 지휘관은 아프리카에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롬멜 군단을 궤멸시킨 장본인인 몽고메리가 롬멜과 프랑스 서해안에서 다시 한번 악연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 참 기구합니다.

노르망디 dday 롬멜
에르빈 룸멜

상륙 작전은 두 단계로 진행됩니다. 1944년 6월 6일 새벽에 연합군은 공수부대의 야간 투입을 먼저 시작하는데, 이윽고 날이 밝자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노르망디 dday 상륙잔전 공수작전
노르망디 dday 낙하 공수부대 밴드오브브라더스 1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하지만 작전 개시가 시작되기 이전에 항상 그렇듯이 기만 작전이 선행되게 되는데 보디가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기만 작전은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 지점인 노르망디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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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dday지도

기만 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 북쪽 지역에 행해질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미 1군이 패튼 장군의 지휘아래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에 곧 상륙 작전을 할 듯이 양동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망디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칼레에 상륙할 듯한 위장 작전은 계속되어서 독일군의 방어 병력이 흩어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기만작전

연합군은 기만작전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머’나 ‘텍사블’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위장 작전이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기만작전은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 칼레 앞바다인 도버 해협 상공을 비행하며 방대한 양의 얇은 금속 박편을 살포하여 독일군 레이다를 교란하는 것이었는데. 칼레 해안에 곧 상륙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오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날씨가 관건이었던 D-Day 성패

노르망디 지역은 매월 약 열흘 간만 상륙 작전이 가능한 날씨였습니다. 그중에 만월이 되는 날의 밝음과 조류가 작전 실시에 가장 이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름달의 밝은 달빛은 공중에 수송기들이나 글라이더들이 투하 지역에 지형지물을 잘 식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또한 조류는 해안에 독일군이 설치한 상륙 저지 장애물들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로 높은 해수면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6월 5일이 바로 만월이 뜨는 날이었고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잠정적으로 6월 5일과 6일 사이에 야간을 작전 개시일로 결정했었습니다.

하지만 5월에는 쾌청하던 날씨가 6월이 들어서면서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6월 4일 악천후는 작전 실시 불가함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강풍과 파도는 상륙 모선이 상륙정을 발진시킬 수가 없게 했고 낮은 시계는 항공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미 병력을 싣고 영국의 항구를 출발하였던 함선들은 영국 남해안으로 다시 돌아와 만이나 강구에서 대피하고 있어야 했는데 상식적으로 본다면 6월 5일 침공계획은 전면 취소하여야 했고 함선들은 항구로 돌아오고 병사들은 원래 머무르던 기지 생활관으로 되돌아 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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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상륙 작전에 사용될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수품들이 모두 바다에 떠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는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대기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6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중대한 회합이 있었는데 이 회합에서 영국 공군 기상대장 JM 스태그 대령은 6월 6일에는 기상이 약간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를 브리핑했습니다. 지상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와 아이젠하워 참모장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장군은 작전을 원 계획대로 강행하자고 주장했으나 연합군 항공군 사령관 레이 말로리(Sir Trafford Leigh-Mallory) 경은 작전 강행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연합군 해군 사령관 버트람 램지(Sir Bertram H Ramsay) 제독은 중도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스태그 대령의 기상예보를 근거로 작전 강행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악천후는 결과적으로 충분한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게하여, 강력하게 요새화 되어 있는 오마하와 주노(Juno)의 해안 방어력에 대한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D-Day 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의 방심

한편 영불 해협 방면보다도 더 험한 북부 프랑스의 악천후는 독일군을 안심하고 경계를 풀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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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그간 미영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계속적으로 경고 받고 있어서 높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끔찍한 악천후는 적어도 며칠간은 마음을 놓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일부 부대는 비상 경계령을 일시 해제하기도 하였고 많은 고위 지휘관들은 주말을 맞아 위치를 떠나거나 했습니다.

노르망디 dday 롬멜 가족

해안선 방어를 책임진 에르빈 롬멜은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해 며칠간 독일의 집으로 귀가했었을 뿐만 아니라 수 십 명의 사단장이나 연대장 그리고 대대장들이 침공 대비를 위한 워 게임(war game) 연습을 위해서 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대규모 공수 작전 개시

무려 17,000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6월 5일 밤부터 6일 새벽 사이에 프랑스 상공에서 하늘로 내던져지게 됩니다.

노르망디 dday 낙하 공수부대

미국,영국,캐나다 그리고 자유 프랑스 군들까지 여러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은 프로펠러 수송기뿐만 아니라 글라이더에 나눠 타고 프랑스 상공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발견한 독일군 대공포 부대들은 하늘에 새까맣게 날아오는 연합군 수송기들을 향해 일제히 포격을 가합니다.

노르망디 dday 낙하 공수부대 밴드오브브라더스

오랜 시간을 이날을 위해 뼈를 깎는 훈련을 감수했던 수많은 공수부대원들 중에는 미쳐 땅 위에 발이 닿기도 전에 그들이 탑승한 수송기나 글라이더를 산산히 부숴버리는 대공 포화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노르망디 dday 글라이더

6월 6일에서 3일 동안 17,000명의 연합군 공수부대원들 중에 확인된 전사자 1,003명, 행방불명 4,490명을 합하면 전체 인원의 1/3이 넘는 병력이 전사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살아남은 병력 중에서도 2,657명은 부상자로 기록됩니다.

애초 계획과 달리 분산되어 낙하한 대다수의 공수부대원들은 낙하 당일 밤에 독일군들과의 교전에서 상당수 전사하게 됩니다.

노르망디 dday 낙하 공수부대 밴드오브브라더스 2
영화 밴더 오브 브라더스 중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수많은 공수부대원들의 죽음을 시작으로 날이 밝자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길고 길었던 하루가 시작됩니다.

독일군의 방어 계획

1943년 말 프랑스 북서부 해안의 방어를 책임지게 된 에르빈 롬멜 장군은 앞으로 언젠가는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므로 효과적으로 상륙을 저지할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 해결책은 바로 대규모 지뢰 매성과 해안 장애물, 벙커, 포 진지 및 예상되는 연합군 공수부대의 강하와 글라이더 착륙을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부대

우선 노르망디 상륙 작전 불과 보름 전인 1944년 5월 20일까지 프랑스 해안에 파묻은 지뢰의 수는 무려 420만개였으며 이중 270만개는 롬멜의 지휘 하에 매설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공수부대를 대비하여 후방에도 매설했습니다.

해안 장애물의 설치는 연합군의 상륙정을 파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기뢰

해안 장애물은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만들어졌는데 모두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설치 작업을 진행한 독일 공병 부대가 연합군 상륙 당일까지 2개 구역만 설치를 끝낸 덕분에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미쳐 공사를 끝마치지 못한 구역은 상륙부대보다 먼저 투입된 영국 코만도 특수부대들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영국코만도 1
2차대전 당시 영국 코만도

독일군 기록에 따르면 5월 13일까지 모두 52만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31,000개의 수중 기뢰가 설치되었습니다.

또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륙할만 지점에 30미터 간격으로 높이 3미터의 말뚝을 세우고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기선을 연결하였는데 실제로 D-Day에 상당수의 연합군 공수부대는 글라이더들을 사용하여 착륙을 감행합니다.

노르망디 dday 글라이더 착륙 1
두동강 난 글라이더들이 보이네요.

심지어 말뚝 위에 폭탄까지 설치해서 착륙 중에 말뚝을 건드리는 글라이더를 폭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작 상륙 당일날까지 이런 말뚝들이 충분히 설치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부족하나마 세워놓은 장애물들이 제법 그 효과를 발휘하여 글라이더로 투입된 공수부대 병력은 상당수가 착륙 과정에서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특히 공수부대 지휘관 위치의 장교들 중에서 낙하산 대신 글라이더를 타고 부하들과 함께 적진에 투입된 결과 더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낙하 공수부대 밴드오브브라더스 3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중

이런 노력도 효과를 보았지만 롬멜이 야심차게 준비한 두번째 전략은 바로 그의 전공인 기갑부대의 운용이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룸멜 자주포 부대
노르망디 방어선을 시찰하는 에르빈 롬멜과 독일 제 21 기갑사단의 Sd Kfz 135/1 150mm 자주포

즉 해안에 연합군이 상륙하면 해안 안 쪽에서 대기하던 탱크들이 밀어붙혀서 상륙한 적들을 다시 바닷물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아이디어였습니다.

노르망디 dday 룸멜 자주포 부대 1
노르망디 해안에 포진시킨 독일 21 기갑사단 자주포 승무원들

어쩌면 이런 전략이 제대로 강구되었다면 노르망디 상륙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맺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이런 롬멜의 아이디어는 그의 상관인 아돌프 히틀러, 서부지역 총 사령관 게트르 폰 룬트슈테트 장군뿐만 아니라 서부 기갑전단의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장군과 그 견해가 모두 제각각 틀렸습니다.

특히 기갑부대를 맡은 장본인인 슈베펜부르크 장군과 롬멜의 견해 차이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그 이유는 슈베펜부르크와 같은 정통파 참모 장교 그룹들은 롬멜을 경원시하고 있었고 그의 창의적인 기갑부대 배치 전략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룸멜 기갑부대 4
기갑부대를 숨기고 주요 도로와 철도로 이동하자고 주장한 슈베펜베르크 (이미지 출처 : FMKOREA)

게다가 롬멜의 휘하 부대였던 7군의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장군 역시 롬멜의 의견에 반대하였습니다.

이런 롬멜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독일군 내에 귀족 출신 장성들이 평민 출신 롬멜에 대한 싸늘한 시각이 그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비록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축출되는 치욕을 겪었지만 여전히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의 롬멜의 명성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총애받는 장군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개월 후에 롬멜에 대한 히틀러의 애정은 배신감으로 바뀌어 자살을 명령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립니다.)

노르망디 dday 룸멜 기갑부대 2
이미지 출처 : FMKOREA

롬멜은 안지오 상륙 작전의 예를 들어서 기갑 부대를 가능한 한 해안가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슈베펜부르크는 살레르노 전투의 예를 들어서 연합군의 공수부대, 공군력, 해군의 함포의 위력을 감안할 때 기갑부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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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펜부르크가 우려한 기갑부대 배치안 (이미지 출처 : FMKOREA)

이런 첨예한 대립에 대해서 롬멜의 상관인 히틀러와 룬투슈테트 사령관 모두 애매한 태도로 중재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현대의 군사 전문가들도 당시 두 사람의 주장 중에 어떤 쪽이 옳다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누군가는 방향을 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룬트슈테트 사령관이 기갑병력 운용에 문외한이었던 탓에 제 역활을 할 수 없었고,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룸멜 기갑부대 5
히틀러가 최종 결정을 내린 기갑부대 배치도 (이미지 출처 : FMKOREA)

또한 연합군의 꾸준한 기만 작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일군 수뇌부가 노르망디와 칼레 어느 쪽이 최종 상륙지인지를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정쩡한 병력 배치를 하게 되는 것도 계속된 상급 지휘관 간에 반목으로 인한 혼란과 더불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 요인이 되버립니다.

드디어 상륙 작전 개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예정 해변은 무려 80km 길이로 펼쳐진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을 연합군은 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암호명을 붙혔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등장하는 “오마하” 해변도 그 중에 하나였고, 그외 “유타”, 골드, 주노, 소드 이렇게 불렀습니다. 각 지역에 투입된 부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르망디 dday 개시
이미지 출처 : 김동호의 스타트업
  • 유타 해안 : 미 7 군단에 4사단과 90사단, 그리고 영국 2군
  • 오마하 해안 : 미 5 군단에 1사단과 29사단
  • 골드 해안 : 영 30군 3사단과 캐나다 기갑여단
  • 주노 해안 : 캐나다 1군단에 3사단과 2 기갑여단, 그리고 영국군 코만도 부대
  • 소드 해안 : 영국군 코만도 2개 여단, 미 1군단에 3사단과 27 기갑여단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오마하 해변에서 미군들은 방어하는 독일군의 엄청난 공세에 고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dday 14

바로 이 오마하 해변 쪽에 방어를 담당한 독일군은 352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백전노장들이 다수 포함된 독일 육군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노르망디 dday 5

그런 탓에 그 지역에 상륙한 미육군은 다른 상륙 해안에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반면에 영국과 캐나다 부대가 상륙할 동쪽 주노와 소드 해안쪽은 독일 716 보병사단이 맡았는데 신체적으로 약한 병사들과 다른 나라에서 강제로 끌어온 병사, 심지어 소련군 포로들까지 포함한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준이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마이웨이
영화 마이웨이 – 소련의 붉은 군대 포로들로 구성된 동방부대 3개 대대를 포함하는 ‘독일군 제716보병사단’이 방위를 담당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원인 중에 하나를 바로 히틀러가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롬멜이 가장 기대했던 예비 기갑 부대를 상륙 작전 임박했을 때 히틀러 자신의 명령으로 히틀러가 직접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못하게 했는데 상륙작전 당일 이미 상륙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명령을 못받았다는 이유로 예비 기갑 부대는 신속히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롬멜이 기대했던 방향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고 애초 기갑부대 지휘관과의 불협화음으로 충분한 기갑 병력이 사전에 배치되지 못한 상황에서 예비 병력 조차 투입이 늦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도버 해협을 건너오는 연합군 수송선들과 군함들을 독일 해군이 자랑하는 “바다의 늑대” U 보트들이 미리 발견하여 격침시켰다고 한다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초기에 실패했을 것 아닌가?하는 의문입니다.

여기서 1944년 6월에는 전쟁 초기에 U 보트 잠수함 부대들이 보여 준 공포의 위협은 이미 한풀 꺾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유보트

연합군측 해군, 특히 영국 해군은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하여 수중에 U 보트들을 사전에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일단 위치가 발각된 U 보트들은 연합군 군함들의 집요한 기뢰 공격으로 바다 속에서 파괴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노르망디 dday 유보트 2

특히 영국과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 사이에 도버 해협은 대서양과 같은 엄청난 넓이에 바다가 아니었으므로 그곳에 출몰할 U 보트 정도는 사전에 영국 해군이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D-Day 전날에 영국 해군이 확인한 결과는 상륙작전 병력을 수송한 선단의 경로를 위협한 U 보트는 한척도 없다는 결과였고 실제 노르망디 앞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U 보트의 공격은 없었습니다.

6월 6일 이른 아침 노르망디 앞 바다에 도착한 연합군 해군은 악천후로 차질이 발생한 공군 지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해안 진지들에 엄청난 함포 사격을 개시합니다.

특히 영국의 구형 전함과 포함, 순양함들은 미 해군의 군함들과 함께 포격을 가하였는데 독일의 소형 어뢰정들과 전투기들이 출동하여 반격을 한 결과 영국 구형 전함 한척이 작전 개시 3일째 침몰하고 일부 군함들은 침몰 또는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이미 이태리 반도 상륙 작전을 통해서 사전에 해군의 함포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던 결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해군의 지원은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노르망디 dday 함포 해안사격 4
오마하 비치 독일군 해안포 벙커를 향한 미 해군 전함 텍사스의 14인치 함포 사격
노르망디 dday 함포 해안사격 3
유타 비치 독일군 해안포 벙커를 향한 미 해군 전함 네바다의 14인치 함포 사격
노르망디 dday 함포 해안사격 2
15인치  함포 사격을 가하는 영국 해군 전함 워스파이트
노르망디 dday 함포 해안사격 1
주노 비치의 독일군 해안포 벙커에  6인치  함포 사격을 가하는 영국 해군 전함 벨파스트

하지만 안타깝게 악천후 날씨에 부족한 공군의 지원은 상륙 싯점에 대다수의 해안에 근접한 기관총 초소들을 무력화시키는데는 실패하여 오마하 해안의 경우 2,000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이 독일군의 무차별 사격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륙작전의 목표는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1. 우선 유럽 내륙으로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상륙한 부대들은 해안을 방어하는 독일군 병력들을 무력화 시킨 후에
  2. 본격적인 진격을 할 수 있는 도로와 교량들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D-Day 새벽에 먼저 해안 내륙 쪽에 투하된 수많은 공수부대원들의 목표는 해안을 상륙한 부대들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해안 내륙 마을들과 교량, 도로를 사전에 확보하려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노르망디 dday 낙하 공수부대 밴드오브브라더스 5

하지만 앞글에서 말했듯이 의외로 너무 넓은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낙하된 공수부대들은 새벽 야간 중에 독일군들과의 교전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서로 만나서 서로 다른 부대들끼리라도 우선 임시 부대를 편성하고 그 모인 병력 중에서 가장 선임자가 장교가 되었든, 부사관이 되었든 간에 리더로 앞세워 또 다른 병력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노르망디 dday 낙하 공수부대 밴드오브브라더스 4

분명히 지나치게 산개되어 애초 계획했던 지점에서 훨씬 넓게 퍼져 낙하된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군들을 찾아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독일군 입장에서는 사방 천지에 떨어진 적군들을 수색하느라 일부 상륙 해안에는 제대로 방어병력을 충원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것은 부수적이긴 하지만 매우 중요한 연합군의 작전 승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작전 차질에도 불구하고 밤새 서둘러 구성된 임시 부대는 D-Day 후에 최초로 Sainte-Mere-Eglise라는 이름의 도시를 독일군의 수중에서 해방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야간 공수 작전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반면 영국군과 캐나다 군 공수부대도 거의 같은 시간에 노르망디 해안 동쪽 지역 내륙에 낙하하게 되는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곳을 방어하는 독일군 716 보병사단이 원래 약체의 부대인 탓에 비교적 적은 희생을 치루고 해안에서 불과 7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중요한 교량들을 점령하게 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에서 상륙정이 해변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는데 바로 정면에 언덕에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서 상륙정 속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앞줄에 병사들이 상륙정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벌집이 되어 바다 속으로 쳐박히는 끔찍한 장면이 나옵니다. 과연 진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노르망디 dday 기관총

대답은 “Yes” 였습니다. 실제 오마하 해변에서 상륙하려던 50,000명의 병사들 중에서 3,000명의 병사들이 전사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실제로 애초 예정 지점보다 훨씬 동쪽으로 밀려가서 상륙한 상륙정들 앞에는 강력한 기관총 초소 바로 앞이었던 것입니다.

최초에 도착한 상륙정들안에 장교들과 부사관들, 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전멸했습니다.

그나마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모래톱으로 기어 올라온 병사들 역시 제대로 엄폐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아야 했는데 만약에 독일군 자신들이 세운 장애물들이 아니었으면 연합군 병사들을 엄폐해줄 물건이 하나도 없는 모래 사장 위에서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노르망디 dday 라이언일병 구하기 1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 디데이 상륙 장면

해군의 함포가 분명히 노르망디 해안 전체에 걸쳐서 독일군의 방어 능력을 저하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오마하의 경우 특히 잘 건설되있는 방어 진지들은 함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쉽게 파괴되지 않았고 다른 해안에 비해서 2배나 많이 배치된 독일군 방어 병력들이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상륙 지역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옥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마하 해변은 영화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셈입니다.

노르망디 dday 라이언일병 구하기 2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 디데이 상륙 장면

이런 희생을 치른 후에 함포 지원을 받으면서 뒤이어 상륙한 병력에 의해서 1,20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기관총 진지들을 파괴한 후에 상륙에 성공합니다.

반면에 미군의 또 다른 상륙 지점이었던 유타 해안은 오마하와 마찬가지로 애초에 상륙하려던 지점보다 훨신 동쪽에 상륙하였는데 그런 실수로 독일군 기관총 진지 코 앞에서 총알 세례를 받으며 상륙해야 했던 오마하와는 반대로 실수로 상륙하게 된 지점이 의외로 독일군의 방어가 매우 허술한 지점이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인 197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수월하게 상륙에 성공하게 됩니다.

게다가 우연이었지만 내륙에 낙하했던 101 공수 사단의 2개 연대와 쉽게 연결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됩니다.

101 공수 사단의 본진과 만나게 되면서 쾌속 전진을 하게 된 상륙군은 다른 지역들에 부대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깊숙히 내륙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노르망디 dday 영국군
골드 해안에 상륙하는 코만도 부대

소드 해안의 경우 상륙한 영국군은 유타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으로부터 비교적 약한 공격을 받으면서 상륙 첫날 무려 8km 내륙으로 전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노르망디 dday 영국군 2
소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군 1 특수여단 코만도 대원들

하지만 영국군은 몽고메리 원수가 강력하게 명령했던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캉(Caen)을 점령하는 것을 실패합니다.

노르망디 dday 영국군 3
캉(Caen)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콜레빌-쉬르-오른 마을을 통과해 페가수스 다리로 향하는 45 해병 코만도부대 대원들

이지역에 독일군은 D-Day로부터 무려 한달하고 2주를 넘긴 7월 20일에야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됩니다.

특히 이곳에서의 전투가 언론에 주목을 끈 것은 영국군이 상륙했을 때 빌 밀린이란 병사가 스코틀랜드 전통 악기인 백 파이프를 연주하면서 상륙을 선도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노 해안의 상륙을 맡은 캐나다군은 오마하에 미군 다음으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노르망디 dday 캐나다군 1
주노 해변에서 독일군 포로를 경비하는 캐나다군

이곳에는 2개의 155mm 대포 진지들과 무려 9곳의 75mm 대포 진지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마하 해안보다 두배나 높은 방벽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캐나다군 2
주노 비치에 상륙하는 캐나다 제 3 보병사단

상륙 선두 부대들은 50%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하지만 캐나다 군은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국 독일군 방어 병력들에게 타격을 주면서 진지들을 하나, 둘씩 점령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 보병들과 함께 상륙에 성공한 탱크들이었습니다.

노르망디 dday 캐나다군 3
캐나다군이 노획한 독일군의 작전실 주노 비치 모형

애초 중요 목표 중에 하나였던 Douvre 레이다 기지는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로 당일 함락시키지 못하고 3일째 되어서야 영국 코만도 특수부대들이 투입되어 함락하게 됩니다. D-Day 당일 약 3,000명의 캐나다 군이 상륙하였습니다.

캐나다 군은 방어를 위해서 추가로 투입된 히틀러 무장 친위대(SS)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성공적으로 격퇴합니다.

끝으로 골드 해안은 영국군이 상륙을 시도하였는데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공격으로 고전을 하면서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애초에 보병 상륙과 함께 지원을 위해 상륙 예정이었던 셔먼 전차들의 상륙이 늦어져서 뜻밖에 큰 피해를 입게 되지만 전차 상륙 후에 마을을 통째로 방어 진지로 만들어 놓고 방어하던 독일군들을 강하게 밀어붙혀서 함락에 성공하고 진격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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